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카하타 이사오 (문단 편집) == 생애 == 1935년 10월 29일 일본 [[미에현]] 우지야마다시(現 [[이세시]]) 에서 타카하타 아사지로(高畑浅次郎)의 자녀로 태어났다. 위로 두 명의 형과 한 명의 누나가 있고 막내였다. 1943년에 부친이 [[오카야마현]]에 있는 한 중학교(현재의 고등학교에 해당한다)의 [[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어 [[오카야마시]]로 이사했다. [[국민학교]] 4학년생인 만 9살 때에 [[1945년]] 6월 29일 새벽 2시부터 4시까지 [[오카야마시]]는 [[미군]]의 무차별 폭탄 [[공습]]을 받았고, 바로 윗누나와 함께 도망치다가 가족과 헤어지고 하필이면 마을 한가운데로 들어가버려서, [[소이탄]]이 마구 쏟아져서 화재가 일어난 곳으로 들어가서 죽을 뻔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고 한다. 누나는 그 화재에서 부상을 당했고 오랫동안 [[화상]]의 상처가 남았다고 한다. 이윽고 새벽이 되어 강둑에서 차가운 검은 비를 맞고 정신을 차리는 체험을 했는데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경험이었고 이후 인생에 강렬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날부터 이틀 동안 가족을 찾아서 방황했는데 어느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고 아무 것도 못 먹고 누가 [[고구마]] 쪼가리 하나 던져주는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런 체험을 했으니까 타카하타 이사오는 그런 (시니컬한) 성격이 되어버렸다고 말했다. "성격파탄자"라고도 말했다. [출처: 꿈과 광기의 왕국] 이후 대학에 진학해서 [[도쿄]]로 [[상경]]해 명문 [[도쿄대학]] [[불문과]]를 전공하고 졸업했다. 아버지를 비롯한 3형제 모두가 도쿄대를 졸업한 집안이었다. 대학 동기로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오에 겐자부로]]가 있다. 1955년에 일본에서 극장 개봉한 프랑스의 장편 애니메이션 [[왕과 새]]의 원형이 된 "사팔뜨기 폭군"(1952)을 보았는데, 프랑스 시인 [[자크 프레베르]]가 각본을 쓴 작품이었다. 이 작품으로 쟈크 프레베르를 처음 접하게 되었고 엄청난 영향을 받고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기로 결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애니메이션 영화로도 사상을 말할 수 있다는 점에 놀랐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보고 메모를 적고 영화속의 나오는 밀실의 평면도도 고찰해서 그렸다고 한다. 당시 1950년대의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몇 년 전까지는 [[귀축영미]] 적국이었던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영화가 극장에서 차례차레 개봉해서, 연일 매진사태로 큰 인기였다. 그는 디즈니 와는 다른 노선의 프랑스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감명을 받았다. 그의 대학교 졸업 논문은 쟈크 프레베르의 작품 연구였고, 훗날 2004년에는 자크 프레베르의 명시집 《Paroles》을 처음으로 일본어로 완역했다. 장편으로 개작한 [[왕과 새]](1980년작)의 자막 번역도 맡았다. 지브리의 [[붉은 돼지]]의 극중 삽입곡 체리가 익어갈 무렵(원곡은 프랑스의 Le Temps des cerises)의 일본어 가사 [[https://youtu.be/dwlv07jXKOE?si=6XMhWMVI1JuOP4UA|さくらんぼの実る頃♪]] 번역도 해서 극장용 팜플렛에 실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1959년에 [[토에이 애니메이션|토에이 동화]]에 입사했다. 그림을 전혀 그리지 못하는 데도 입사가 가능한 것은 토에이가 연출조수를 공모해서 뽑은 제1기생이었고, 도쿄대 졸업생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애니메이션 제작은 미천한 직업이라는 인식이라 회사에서는 "도쿄대학 졸업자가 애니메이션을 하러 왔다고?" 하고 크게 놀랐었다고 한다.[* 도쿄대학 출신 감독 [[나카무라 료스케]]도 "내가 아는 선에선 도쿄대학 출신 애니메이션 감독은 타카하타 이사오 밖에 모른다." 라고 했다.] 입사동기로는 [[하늘을 나는 유령선]]과 [[동물 보물섬]]을 연출한 이케다 히로시(池田宏)와 프로듀서 출신으로 훗날 [[톱 크래프트]]를 설립하고 초창기 [[스튜디오 지브리]]의 실질적 CEO 역할을 한 하라 토오루와 [[애니메이터]]로는 [[코타베 요이치]]가 있다. 평생의 라이벌이자 절친인 [[미야자키 하야오]]는 [[1963년]]에 입사해서 4년 늦은 입사 후배였다. 입사 당시 토에이 동화에는 여러 작화반이 있었고, 어쩌다 [[오오츠카 야스오]]반에 배속이 되었고, 호기심이 넘쳐났던 때라 여러가지를 물어봤는데 그는 싫어하는 내색이 없이 잘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장난꾸러기 왕자의 오로치 퇴치]]에서 연출 보조로 데뷔했다. 이때 감독이었던 [[세리카와 유고]]에게 영화적인 연출법을 전수 받아 그를 스승으로 언급한다. [[https://area.autodesk.jp/column/trend_tech/daybreak_3dcg/13/|#]] 세리카와 말로는 타카하타는 현장 관리나 사람을 다루는 건 신인인데도 자신보다 잘 했다고 한다. 한참 선배인 애니메이터가 고집을 부리거나 뭔가 이상한 걸 내놓으면 논리적인 말로 맞대응해서 할 말이 없게 만들곤 했다고. 오로치 퇴치는 타카하타가 아니었으면 그 퀄이 안 나왔을 것이라고 한다. 아침에 늦게 지각 출근해서, 책상에 앉아 아침식사 대용으로 [[식빵]]을 [[팩맨(1980)|파쿠파쿠(우걱우걱)]] 씹어 먹는다고 별명이 '파쿠상(パクさん)'이 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오시이 마모루]]는 애칭으로 그를 '파쿠상'이라고 불렀다. 타카하타도 그 별명이 마음에 들었는지 몰라도, 본인이 연출한 [[늑대 소년 켄]]의 콘티 책의 표지에는 PAC(파크)라고 크게 적어넣었다. 선배였던 [[오오츠카 야스오]]의 말로는 타카하타는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일본 최고 명문대 [[도쿄대학]] 출신이었고 노년의 사진만 보면 믿기 힘들지만 어릴 때는 꽤 귀염상에 [[https://www.asahi.com/articles/TKY201312120213.html|#젊은 시절의 타카하타 이사오의 모습]] 말도 잘 해서 여자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토에이의 여성 직원들이 [[도시락]]을 만들어서 그의 자리에 바쳤지만 그는 항상 [[지각]]을 했기 때문에 오오츠카 야스오가 그 도시락을 몰래 먹은 적도 있다고 한다. 반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인기가 없었다고 한다. 왜 인기가 없었냐는 [[스즈키 토시오]]의 질문에 오오츠카 야스오는 '''"[[얼굴]]."''' 이라고 즉답했다.[* 출처 '스즈키 토시오의 지브리의 땀투성이 3'] 1963년에 TV 애니메이션 "늑대소년 켄"으로 연출에 데뷔했다. 그림을 썩 잘 그리지 못하는데도 연출로 올라가는 속도가 이례적으로 빨랐는데 다름이 아니라 도쿄대학 출신이라 그렇다. 고학력자니까 뭘 시켜도 잘하겠지 하고 토에이에서도 덜컥 큰일을 맡긴 것이다. 능력도 출중했고. 이 때의 작화감독이었던 [[오오츠카 야스오]]가 발탁해서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1968)의 처음으로 극장용 영화의 연출을 맡았다.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은 작품성에선 인정을 받았지만 시간과 돈은 너무 많이 소비하고 흥행에서도 토에이 동화가 한 번 망할 뻔할 정도로 실패하여 회사에서 입지가 좁아졌다. [[TVA]] 연출 보조로 강등당했다. 이후, 망할 뻔한 토에이 동화의 코스트 다운 경영 정책에 맞서 싸운 [[노동조합]]의 노사분규의 진통으로, 회사측은 대규모의 인력정리를 감행했다. 1971년 6월, 타카하타는 [[미야자키 하야오]], [[코타베 요이치]]와 함께 토에이를 떠나 [[신에이 동화|A 프로덕션]]으로 이적한다. 흥행 실패로 다시 한번 영화의 감독을 맡을 일도 요원했고, 먼저 이적해 있던 [[오오츠카 야스오]] 선배와 [[도쿄 무비]]의 사장 후지오카 유타카가 [[말괄량이 삐삐]]를 [[TVA]]로 만들거라며 스카웃 제의를 해왔기 때문이었다. 타카하타는 혼자서 갈 수는 없었고 유능한 미야자키 하야오와 코타베 요이치는 꼭 필요했다. 유망한 그 둘을 자신의 욕심 때문에 장래를 망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면서도 설득했다. 미야자키는 바로 함께 떠나기로 결단했으며 코타베는 아내 [[오쿠야마 레이코]]가 남는 조건으로 주변에 용인울 받은 후에 9월에야 간신히 떠날 수 있었다고 한다. 훗날 밝혀진 비화를 읽어 보면, 이미 [[토에이 동화]]를 떠나 1주일 후에는 다른 회사로 이적하기로 한 날에도, 노조 운동을 하면서 동료 직원들 앞에서 열성적으로 연설을 하면서 절대로 회사를 그만둬서는 안되고 끝까지 남아서 투쟁해야 한다고 외쳤다고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정작 자신들은 회사를 옮길 계획인데 왜 그런 말을 했냐고 타카하타에게 물어 봤을 때, 노조 간부의 입장(타카하타 이사오는 1961년 토에이 동화가 노동조합을 만들었을 때부터 부위원장으로 노조 간부였다)에서는 그런 말을 할 수 밖에 없다. 개인의 입장과는 다르다고 말해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사람은 대단하다' 라고 감탄을 했다고 한다. [[도쿄 무비]]의 실제작을 맡았던 [[A프로덕션]]에서 [[말괄량이 삐삐]]를 [[TVA]]로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원작자가 끝내 애니화를 허락하지 않아서 기획은 엎어지고, 할 일이 없어진 상태에서, [[오오스미 마사아키]]가 갑자기 감독직을 내팽개치고 떠나버린 [[루팡 3세(1기 TV시리즈)]]로 투입되어 [[미야자키 하야오]]와 연출을 했다. 다만 타카하타는 루팡이라는 캐릭터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미야자키에게 대부분 맡기고 조언이나 다듬어주는 작업 정도만 했다고 한다. 말괄량이 삐삐같은 양질의 문학 작품을 애니화 하겠다고 회사를 옮겼는데[* 스즈키 토시오의 말에 의하면,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소설)|모모]]도 애니화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결국 루팡 3세같은 [[성인만화]] 원작의 바보같은 시시껄렁한 것을 만들게 된 처지에 놓이자, [[토에이 동화]]에서 남아서 [[노조]] 운동을 하면서 고생하는 동료들에게 면목이 없고 미안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연출자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다. [[1972년]], 그 다음 작품으로 당시 일본에서 불었던 [[팬더]] 열풍과 엎어진 삐삐 기획을 접목한 단편 [[팬더와 친구들의 모험]]과 속편인 '팬더와 친구들의 모험 우천 서커스의 편'을 감독했다. 어린이 관객에게 호응이 좋아서 스태프들은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이즈음 새로 창립된 즈이요 영상([[닛폰 애니메이션]]의 전신)의 사장이 타카하타를 스카웃했고, 미야자키, 코타베도 그를 따라 A프로덕션을 떠나 함께 옮겼다. 그리고 일본 애니메이션 사상 처음으로 해외 로케이션 취재를 시도한, 그리고 그 전까지는 일본 애니업계에서는 없던 장면설정([[레이아웃]]) 담당(미야자키 하야오)와 캐릭터 디자인(코타베 요이치)라는 전문 분야직을 새로 만들어서 맡겨서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애니메이션|알프스의 소녀 하이디]](1974)을 만들어서 큰 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연이어 [[세계명작극장]] 시리즈 노선으로 [[엄마찾아 삼만리]]와 [[빨강머리 앤/애니메이션|빨강머리 앤]]을 연출하고 이 역시 비평과 [[시청률]]에서 큰 성공을 거둔다. 타카하타 이사오는 '시청률의 사나이'라고 불리우며 [[방송국]]에 가면 국장이 마중나와 인사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처음으로 [[TVA]] 26화 시리즈의 연출을 맡은 [[미래소년 코난]](1978)는 8화까지 만들고는, “어떡하지? 다 끝났어” 라고 스토리가 턱 막혀버렸는데, 이때 타카하타 이사오가 대타로 9화와 10화의 그림 콘티와 연출을 해 주었다. 그는 꼼꼼하게 1화부터 전부 본 다음에 미야에게 잇따라 물었다고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나?” “그때 그게 참 싫었지.” 미야자키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는데, 그곳에서 다카하타가 새로 문제를 만들어둔 덕분에 미야자키는 다시 11화 이후부터 이어나갈 수 있었다. 1980년에 [[텔레콤 애니메이션 필름]]으로 옮겨, 야심가 [[후지오카 유타가]] 사장이 세계 시장을 겨냥해서 사운을 걸고 만든 대작 [[리틀 네모]]의 감독직을 맡기로 했다. 그리고 제작 연습을 겸해서 1981년에 [[꼬마숙녀 치에]] 첫번째 극장판을 감독하여 흥행에도 성공을 거두었고 이듬해에는 6년간 공을 들인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 [[첼로 켜는 고슈]]를 공개해서 호평을 받았다. 그 하지만, 사공이 많은 배인 [[리틀 네모]]는 의견 조율이 안되고 좀처럼 제작이 진행되지 않자 1983년에 텔레콤을 퇴사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1981년에 회사에 불만을 품고 먼저 텔레콤을 떠난 상태였다. 그리고 이 무렵 제작 준비를 위해 미국 [[LA]]에 머물렀을 때, Frédéric Back[* [[프랑스계 캐나다인|프랑스계 캐나다 사람]]이라 인명 표기가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여러가지가 있다. (대표작은 [[나무를 심은 사람]])]의 [[https://www.youtube.com/watch?v=xsWU-nksQWA&t=18s|작품 crac!]]을 접하고 감명을 받고 이후 작품 스타일에 큰 영향을 받는다. 훗날 그를 찾아가서 직접 만나기도 했다. Frédéric Back도 1998년에 [[스튜디오 지브리]]를 방문하고 타카하타 이사오와 재회하기도 했다.[[https://youtu.be/J3KxIuevNA8?si=BBGhTr_T_2FchJiW|유튜브 영상]] 이후 [[프리랜서]]가 되어,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에서 프로듀서를 맡았고 이를 계기로 하여 1985년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스튜디오 지브리]]의 창립 멤버가 된다. 그리고, 창작자는 경영에 끼어들면 안된다면서, 사원으로 소속해 있으면서 죽을 때까지 경영에 관여하는 임원직은 맡지 않았다. [[천공의 성 라퓨타]], [[마녀 배달부 키키]] 등의 미야자키 작품에서 프로듀서 혹은 [[음악]] 연출을 맡는 한편 자신의 작품도 만들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프로듀서를 맡아준 은혜를 갚는 차원에서 선배가 만들고 싶어하는 작품의 프로듀서를 맡기로 하고 제작비를 지원한 강과 인간의 관계와 썩어가는 하천을 청소해서 되살린 [[공무원]]과 마을 사람들을 다룬 문화 다큐멘터리 실사영화 [[야나가와 호리와리 이야기]](1987)는 절반도 못 만들었는데 [[물먹는 하마|돈먹는 하마]]처럼 제작비를 바닥을 내더니, 급기야 미야자키 하야오가 살던 저택을 [[저당권|저당]]잡히게 만들었다. 이윽고, 1988년 "[[반딧불의 묘]]", 1991년 "[[추억은 방울방울]]", 1994년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등을 감독했다. 1999년, "[[이웃집 야마다군]]"을 개봉했으나 흥행에서는 참패했고 한동안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반딧불이의 묘의 경우는 개봉 날짜까지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몇 장면에서 색칠을 못하고 선화(線畵)로만 움직이는 미완성인 채로 상영하게 된 것에 책임을 지는 것으로 연출직을 폐업할 것을 결심했지만, 미야자키와 주변의 만류와 권유로 다시 애니메이션 감독직을 맡기로 했다. 추억은 방울방울을 만들기 전에는, 같은 [[일본 공산당]]을 지지하는 [[콘도 요시후미]](1976년 부터 일본 공산당의 당원)와 함께 아동문학가 시카타 신(しかたしん) 원작의 [국경(国境) 1986-89의 3부작]이라는 소설 작품을 원안으로 [[만주국]]과 조선반도의 사람들의 일상을 그리면서, 일본인의 현지인 차별의 실태를 폭로하려는 기획을 준비했는데 1989년에 [[천안문 사태]]가 일어나고 그 영향으로 기획은 흐지부지 백지화가 되었다. 만일 만들어졌다면 한국인 입장에서는 대단히 흥미로운 소재였다. [[https://lite-ra.com/2018/04/post-3949_2.html|일본 블로그 내용 소개 (일본어)]] 반딧불이의 묘 이후로는 리얼리즘 노선와는 정반대인, 12세기부터 시작한 일본의 전통 [[에마키]]에 대해 연구를 했다. 일본 미술과 애니메이션의 원류는 선화(線畵)라고 생각했고, 영향을 받은 Frédéric Back의 작품세계처럼 배경과 인물이 일체화 된 예술성을 추구한 [[이웃집 야마다군]]과 [[가구야 공주 이야기]]를 만든다. 그러나, 너무나도 달라진 그의 영화는 일반 관객들에게 외면을 받았다. 2013년 [[가구야 공주 이야기]]를 통해 14년 만에 복귀. 이것이 은퇴작이 된다. 이 작품은 스폰서를 하기로 한 [[닛폰 테레비]]의 회장인 우지이에 세이치로가 돈은 얼마나 들어도 좋으니 죽기 전에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작품을 보고 싶다는 제안으로 시작된 기획인데, 제작비는 역대 최고 51억 엔이 들고, 총 제작 기간은 질질 끌어서 8년이 걸렸는데, 정작 돈을 대준 그 인물은 개봉하기 전에 죽어버려서 완성작을 보지도 못했고, 흥행은 들인 제작비 회수도 못하고 폭망해 버린 웃지 못할 뒷이야기가 있는 작품이다. 더구나 카구야 공주 이야기는 타카하타가 토에이 동화 재직 시절 구상한 기획이었고, 이것을 이제 와서 굳이 만들 생각도 없었는데 [[스즈키 토시오]]가 이거를 영화로 만들어라 만들어라 1년 가까이 설득해서, 겨우 승락하고 만들고 싶지도 않은 것을 억지로 만든 거라서 마지막 유작이 이런 식이라 뒷맛이 씁쓸한 작품이다. 타카하타 이사오는 차기작 구상에 의욕적이라서 [[헤이케모노가타리]]를 베이스로 한 신작도 구상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제작은 성사되지 않았다. 가구야 공주 이야기를 만들 때 프로듀서였던 니시무라 요시아키가 지브리를 퇴사하고 차린 [[스튜디오 포녹]]에서 20분 단편 규모로 만들려고 했다고 한다. 원래는 가구야 공주 이야기 보다는 이 작품을 애니화하고 싶어했는데, 타카하타가 의지하는 애니메이터 [[타나베 오사무]]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장면은 그리고 싶지 않다"고 해서 무산된 기획이었다. 2018년 4월 5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미야자키 하야오]], [[스즈키 토시오]]는 평생 담배를 입에 물고 다닌 [[골초]]였고, 타카하타 이사오도 골초였지만 [* 그래서 타카하타가 금연하기 전에는 세 사람이 모여서 회의를 하면 연기로 가득해서 화재현장 같았다고 한다.] 노년에 건강을 위해 담배를 끊었고 과로도 안 하고 살았는데 셋 중에서 가장 먼저 폐암에 걸린 것이 타카하타인 걸 보면 [[아이러니]]컬 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담배를 끊은 뒤로도 늘 같이 다니는 지인인 미야자키와 스즈키가 옆에서 줄담배를 피워댔으니 끊었다고 해도 건강에 별 도움은 안 됐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